NFT : Non-fungible token
예술은 언제나 새로운 세계, 앞으로의 세계를 예고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그러했고, 다양한 SF 영화 소설 그림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오늘의 이 새로운 예술 시장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림을 이미지 파일로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곤 진품을 불태워버리는 일이 벌어지는 신비로운 시장.
뱅크시는 자신의 그림 <멍청이>를 이미지 파일로 만든 후, 불태웠다. 남은 건 그림의 구도와 스케치를 모방하는 0과 1의 비트들과 그것에 부여된 고유 번호, NFT이다. 이 번호는 그림<멍청이>의 소유권을 명시한다. 누군가 전 세계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이 번호를 가진다면 그가 곧 그림<멍청이>의 주인이 된다. 멍청이의 NFT는 15억에 팔렸다. 진품이 사라진 작품의 '진짜 소유자'를 가리는 게임이 벌어지는 이 광경은 퍽 생경하다.
뱅크시의 그림은 불탔다. 그러면 15억의 거금을 투자한 그 '소유자'는 대체 무엇을 '소유'하게 된 것일까.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가령 뱅크시의 경우와는 달리 작품 자체가 실물이 없는 디지털 객체인 경우를 말이다. 그림판으로 그린 그림, 0과 1의 1 비트의 조합이 실질적인 존재 양태인 어느 jpg 파일이 있다고 하자. jpg 라는 파일 양식이 그것의 예술 작품으로서의 존재성을 훼손할 수는 없다. 디지털 콘텐츠 자체가 예술의 '진품'이 되는 건 현 시대의 노멀이다.
이 노멀한 방식은 그 전의 모든 예술이 신경 쓰지 않았던 한 문제를 가진다. 진품과 그것을 복사한 가품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는 것. 만일 한 작품이 A 라는 디지털 공간에 있다가 고스란히 B 라는 디지털 공간에 복사되었다고 하자. 이건 어느 솜씨 좋은 화가가 모나리자를 똑 닮은 모작을 그려냈다는 것과는 다른 암시를 가진다. 두 디지털 공간에 있는 두 개의 객체는 전적으로 동일하다. 이 동일함은 '서로 같음'을 넘어서는 깊은 심오함을 지닌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디지털 공간의 두 객체는 실질적인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그 작품을 '소유'하고 있는 주체는 A일까 아니면 B일까. 둘 다일까? 둘에게 모두 소유권을 주는 관대함은 분명 유효하다. 하지만 작품은 어느 곳으로든 쉽고 정확하게 복사될 수 있고, 작품은 한계 없이 수많은 곳에 전시될 수 있다. 작품을 전시한 모든 주체에 소유권을 주는건 어느 곳에도 소유권을 주지 않는 것과 같다.
이 지점에서, 앞서에선 언급되지 않았던 작가의 존재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결국 소유권의 문제는 작가의 창작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해주는 지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러하다. 디지털 콘텐츠가 어느 곳이든 퍼져나갈 수 있다면 창작자는 누구에게서 돈을 받는가? 그러니까 애초에 작가는 자신이 만든 작품을 누구에게 '판' 것일까. 그러나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의문의 해결을 요구한다. 디지털 콘텐츠를 팔았다는 건 대체 어떤 개념일까? 작품을 복사하게끔 허락해준 것일까? 아니면 작품을 독점적으로 제시하고 다른 이들의 복사를 금지하게하는 권한을 부여한 것일까?
이 문제는 하나의 답을 가지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디지털 콘텐츠들은 다양하게 매매 방식을 향유한다. 가령 이모티콘의 경우는 다수의 사람들이 콘텐츠를 소유할 수 있고, 창작자는 소유한 사람들에게 일정 부분의 돈을 받는다. 좋은 방식이다. 하지만 글쎄. 이런 쉬운 방식은 예술품에 적용하기가 애매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아주 오래 전부터 예술 시장의 기반엔 예술 애호가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애호 방식'은 기본적으로 작품을 독점적으로 소유함을 기저에 둔다. 예술 작품 자체가 그것의 고유성을 가진 경우 이 '독점적 소유'는 '실물의 소유'와 등치된다. 앞서 꾸준히 말했듯 디지털 콘텐츠의 경우엔 이것이 불가능하다. 이를 위해 작품의 저작권을 기반으로 복사를 금지하는 방법이 사용될 수 있지만 글쎄 이 또한 불법 복제라는 석연치 않은 구멍이 있다. 실물의 모작과 디지털 콘텐츠의 복제는 큰 간극이 있다.
길게 돌아왔다. 글의 주제인 NFT가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NFT는 디지털 콘텐츠의 '실물성'을 보장하는 매개물이다.
NFT 기반의 예술 시장은 이렇게 작동한다. 창작자는 콘텐츠를 만들어 거래소에 이를 등록한다. 등록과 함께 작품에 세상의 다른 모든 작품과 구별되는 고유 번호가 부여된다. 이 번호가 NFT이다. NFT는 말했듯, 두 개의 콘텐츠에 중복 적용되지 않고 한 작품에 부여된 이상 절대 바뀌지 않는다. 예술의 구매자는 콘텐츠의 jpg 파일을 다운받는 것이 아닌 해당 작품의 NFT를 산다. NFT를 산다는 건 무슨 말일까? 바로 NFT 번호와 함께 구매자의 신상이 기록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구매 기록이 저장된다. NFT는 그러므로 작품 자체의 고유 번호임과 동시에 작품의 구매 기록들을 조회할 수 있는 key값이다. 이 key값을 통해 작품의 소유자를 특정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 디지털 공간 안에서의 작품은 '소유자'의 맘대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이 소유자는 이모티콘처럼 작품을 복사해간 사람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거둘 수가 있고, 다르게는 한 주체에게 작품을 게시할 수 있는 권한을 준 후 이를 복제할 수 없게 법적인 금지 조치를 내릴 수 있다. 콘텐츠가 어떻게 존재하고 향유될 지 결정하는 건 소유자의 자유다.
다시 뱅크시로 돌아와보자. 뱅크시는 작품을 디지털 콘텐츠로 변환한 후 실물을 불태웠다. 뱅크시의 불쇼는 단순한 기성 예술에 대한 비판에 국한되지 않는다. 작품의 실물의 불태우고 NFT의 생성한 건, 예술 작품의 실물성을 현실에서 온라인 가상으로 옮긴 일이다. 이는 21세기 예술 작품의 존재 방식, 소유 방식의 거대한 변곡을 예고하고 암시한다. 생각해보라. 미술 작품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미술관에 걸린 도화지보다 인터넷 사이트의 이미지 파일을 떠올리는 시대는 반드시 올 것이고, 그 과정에서 원래였으면 도화지에 물감으로 그려졌을 '이미지'들이 화면의 '이미지'로 그려지게되는 수많은 경우가 생겨날 것이다. 뱅크시의 불태움은 이 변화를 상징한다.
조그만 지식으로 너무 거창하게 말하고 있지 않나 싶다. 요약하자면 NFT는 점차 예술품들이 디지털화되면서 생겨나는 '소유의 문제, 한 작품을 어떻게 독점적으로 소유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KEY다. 개인적인 기대로 NFT 시장이 점점 더 커지고, 멀지 않은 시기에 예술 시장의 노멀로 자리매김하기를 꿈꾸어본다.
이 기대를 그저 베개 아래의 축축함으로 남겨둘 수는 없다. 사회의 변화는 변화를 기대하는 일에서 시작해 변화를 자각하고 변화된 상황이 익숙해 그걸 인지조차 못하는 상태로 나아간다. 변화의 방향성은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규정된다. 이 급변하는 세상에서 태어난 이상 한번쯤은 커다란 변화의 주도자가 되고 싶다. 지금 NFT는 그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요리조리 만져지고 있는 상태이다. 달리 말해 아직은 그 형체가 확정적이지 않다. 개념의 확립도 미비하다. 엄밀히 말해, NFT를 예술 시장에 접목하는 일이 그러하다. 난 이 변화의 중심에 한번 서보고자 한다.
나의 바람은 NFT의 시장에 한국 문학을 끌어오는 일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무튼,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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